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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09 현역 최고령 MC 송해 별세… 향년 95세로 눈감다

담바우1990 2022. 6. 9. 04:39

220609 (목)  현역 최고령 MC 송해 별세향년 95세로 눈감다

 

현역 최고령방송인 송해가 68일 향년 95세로 별세했다. 경찰과 의료계에 따르면 송해는 이날 오전 0845분쯤 서울 강남구 도곡동  자택 화장실에서 쓰러진채 발견되어 가족들의 신고로 소방과 경찰이 출동했으나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 송해는 올들어 1월과 지난달 건강 이상으로 병원에 입원했으며, 3월에는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에 확진돼 치료 받기도 했다. 송해는 최근 KBS1 '전국노래자랑' MC에서 34년 만에 하차한다는 소식이 알려져 안타까움을 사기도 했다.

 

엔데믹에 야외 녹화가 재개되면서 건강상 이유로 하차를 고민하기도 했으나, 제작진과 스튜디오 녹화로 방송에 계속 참여하는 방안 등을 논의해왔다. 송해 측근은 스타투데이에 송해 선생님이 일상생활에는 어려움이 없으나 아무래도 나이가 있으시다 보니 야외에서 몇 시간씩 하는 녹화는 수월하지 않은 게 사실이라며 고령으로 인한 활동 제약의 고민을 언급했다.

 

국민 MC’로 불리는 송해는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났다. 1950625 전쟁 중에 혈혈단신 남하해 두고온 어머니와 여동생을 평생 그리워했다. 1955년 창공악극단을 통해 데뷔해 66년째 연예계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전국노래자랑초대 MC 이한필을 시작으로 이상용, 고광수 아나운서, 최선규 아나운서 등에 이어 19885월부터 MC를 맡아 왔다.

 

국내 최장수 프로그램인 전국노래자랑34년간 이끌며 국민 MC’로 불렸다. 전국 지역을 돌며 출연자, 관객들과 호흡하며 웃음과 감동을 선사했다. 임영웅 송가인 이찬원 정동원 박상철 등은 전국노래자랑을 거쳐 트로트 스타로 거듭나기도 했다. 대한민국연예예술상 특별공로상, KBS 연예대상 공로상, 백상예술대상 공로상, 한국방송대상 공로상,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 등을 수상했다.

 

KBS는 지난 1월 송해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최고령 TV 음악 탤런트 쇼 진행자부문 기네스 세계 기록 등재를 추진했다. 또 설 특집 기획으로 송해의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담은 트로트 뮤지컬이자 송해를 위해 후배들이 꾸민 헌정 공연 여러분 고맙습니다를 제작해 방송하기도 했다. 송해는 1994년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부인 석옥이 씨는 2018년 먼저 세상을 떠났으며, 유족으로는 두 딸이 있다.

 

 

 

"황해도서 전국노래자랑"그 꿈 남기고 떠난 송해

 

95세 평생 딴따라를 자처했다. 장수 프로 전국노래자랑34년간 진행하며 방방곡곡 서민들의 웃음과 눈물을 함께 했다. 악극단 시절부터 한류 열풍까지 한국 대중문화의 변천사를 온몸으로 통과한 영원한 현역 MC’ 송해가 68일 별세했다. 생전에 그를 인터뷰한 적 있다. 2012년 방송 1505회를 앞두고 만났을 때 그는 전국노래자랑이 자신이 가진 전 재산이라고 했다. “매 회 할 때마다 이게 내 첫 프로다하는 기분으로 한다면서 출연자 하나하나 긴장 풀어드리고, 살아온 얘기 꺼내는, 노래자랑이자 토크쇼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힘들고 그만 두고 싶었던 적이 왜 없겠어요. 정이라며 이만~한 배추김치를 싸서 내미는데 먹다가 목이 막힐 뻔도 하고. 그래도 그분들 무안하지 않게 하는 게 제 몫이죠. 제가 황해도 재령 출신인데, 남은 소원은 거기서 한번 해보는 겁니다.” 황해도 재령. 그리운 어머니를 두고 떠나온 곳. 1950년 발발한 625 전쟁 와중에 혈혈단신 남하할 땐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 몰랐다. “이번에는 조심하거라하며 눈물짓던 어머니와 툇마루에 앉은 여동생이 23세 청년 송해 뇌리에 남은 마지막 모습이다. 그렇게 시작된 유랑 길이 평생 그를 서민의 벗, 무대 위의 광대로 이끌었다.

 

누가 뭐래도 방송인 송해와 한몸인 프로가 전국노래자랑이다. 198011월 첫 전파를 탄 전국노래자랑마이크를 그가 넘겨받은 것은 61세였던 88. 그는 2년 전 교통사고로 스무살 아들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었다. 그런 그를 공개무대 현장으로 끌어들인 이가 배우 안성기의 친형이기도 한 안인기 KBS PD. 고인은 PD 출신이자 영화제작자였던 그의 부친과 오랜 마작 친구 사이였다. 885월 경상북도 성주 편을 시작으로 91년 몸이 좋지 않아 6개월 쉰 것과 말년을 제외하곤 녹화에 불참한 적이 없다.

 

타고난 성실성과 무서울 정도의 프로의식이 바탕이지만 그걸 지켜준 게 강인한 체력 관리다. 소위 BMW 즉 버스(Bus)지하철(Metro)걷기(Walk) 등 대중교통만 이용했다. 지방 공연 때도 전철을 타고 서울역으로 가서 KTX로 이동하는 식이었다. 기획사나 로드매니저, 코디도 두지 않았다. 목욕탕에서 매일 냉온탕을 번갈아 한 것도 남다른 건강관리 비법이다. ‘전국노래자랑녹화 때도 하루 전 미리 내려가 그 지역 목욕탕에서 사람들과 담소 나누기를 즐겼다. “현지 분위기를 파악해야 더 잘 소통할 수 있다는 지론이었다.

 

덕분에 노년에도 강철 체력을 과시했다. 웬만한 장정들이 술 대결을 하다 먼저 나가떨어질 정도였다. 그러다 2019년 말 폐렴으로 입원한 데 이어 지난 9월 중순 7이 빠진 해쓱한 모습을 보이면서 건강 우려를 샀다. 3월엔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기도 했다. 황해도 재령에서 전국노래자랑을 열어보고 싶다 했던 소원도 분단 77년의 한과 함께 스러졌다. 고인은 1927427일 황해도 연백군 해월면 토현리에서 송제근과 박신자의 7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송복희. 오민석 단국대 교수(시인문학평론가)가 펴낸 나는 딴따라다 - 송해평전(스튜디오본프리, 2015)에 따르면 부친은 숙박업체와 주막을 운영했는데 일터 따라 가족이 자주 이사했다고 한다. 재령군으로 옮긴 것은 고인이 초등학교 다닐 때다. 그가 전쟁통에 징집을 피해 고향을 떠났을 땐 가족 중 어머니와 8~9세 연상의 형님, 7~8세 연하의 여동생만 생존해 있었다. 송해라는 이름은 연평도에서 구사일생 탑승한 유엔군 상륙선에서 스스로 지었다고 한다. 함께 배를 탄 약 3000명의 전쟁 난민들은 안남미를 바닷물에 지어 먹으며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었다. “송해는 함상에서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자신의 새로운 이름을 떠올렸다. 그는 바다 해() 자를 따서 마음 속으로 자신을 송해라고 불러보았다.”(같은 책 77)

 

3일 밤낮 항해 끝에 배는 부산항에 닻을 내렸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남한에서 생존 분투가 시작됐다. 전쟁통이라 군 입대를 통해 생계를 해결했다. 육군 통신학교에 배정돼 혹독한 무선 훈련을 거쳤다. 고인은 1953727일 모스 부호로 전군에 휴전협정 조인을 알린 최초 군인들 중 한명이다. 이 기간 군예대 활동도 했다. 북한에서 해주음악전문학교(성악과)에 다닌 게 보탬이 됐다. 38개월간 군복무를 마치고 548월 제대했다. 직업적 예인의 시작은 창공악극단이다. 1951년 창립된 창공악극단에 28세이던 55년 무작정 찾아가 입단했다. 악극 공연과 함께 노래댄스 등으로 구성된 버라이어티쇼를 공개 무대에서 펼치면서 사회자(MC)로서 감을 익혔다. 1960년대 초반 대중문화의 중심이 극장무대에서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으로 급격히 선회할 즈음 자신도 방송계로 발길을 옮겼다. 악극단 시절 재치 있는 만담을 눈여겨본 방송계 인사들 덕이었다.

 

데뷔무대는 동아방송 스무 고개’. 라디오 최고 인기 퀴즈프로그램으로 고인은 코미디언 박시명과 콤비를 이뤄 퀴즈쇼 막간 콩트를 했다. 이들 콤비는 뒤이어 고 임택근 아나운서가 진행한 MBC 라디오 오색의 화원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1964년쯤 송해는 구봉서배삼룡박시명 등과 함께 MBC와 월 약 2만원에 전속 계약을 했는데 당시로선 파격 대우다. ‘웃으면 복이 와요등 코미디 프로를 통해 희극인 끼를 과시했다. 잘 나가던 그가 전국구 스타 반열에 오른 것은 1974년 시작한 KBS 라디오 가로수를 누비며를 통해서다. 앞서 동아방송 나는 모범운전사로 시작된 교통방송에서 그는 운전자들의 애환을 시시각각 전달하며 구수한 입담을 과시했다.

 

아들 사망사고로 인한 실의에 빠져 하차할 때까지 송 기사라는 애칭 속에 14년 간 하루도 어기지 않고 방송을 진행했다. 아들 장례식장에 서울 시내 모든 운전기사들이 다 왔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앞서 그가 한국 최초 여성 MC였던 이순주와 콤비로 73년 시작한 싱글벙글쇼역시 지금까지 40여년 지속되는 MBC 라디오 최장수 프로그램으로 사랑받고 있다. 만능 엔터테이너이자 모든 이들을 격의 없이 대하는 그의 인품이 제대로 발현된 무대가 88년 맡은 전국노래자랑이다. 난생 처음 TV에 나오는 출연자들이 고인의 주름진 웃음과 구성진 말솜씨에 끌려 갖은 끼를 풀어놓았다. 때로 정겹고 때로 우스꽝스럽고, 자주 가슴 찡한 대화가 오갔다.

 

고인은 이들이 챙겨온 음식을 나눠먹고 노래와 춤을 어울려 췄다. 반주를 맡은 악단장이나 카메라 감독까지 무대로 끌어들이는 것도 예사였다. 리얼 버라이어티란 장르가 굳혀지기 전부터 고인은 무대 안팎을 넘나들며 인생의 희로애락을 가감없이 전달했다. 악극단 출신인 고인은 앨범을 여러 장 낸 가수이기도 하다. 1987백마야 우지 마라’ ‘아주까리 등불’ ‘애수의 소야곡1세대 가요를 모아 송해 옛노래 1이라는 타이틀로 첫 음반을 냈다. 이후 2003년부터 2006년에 걸쳐 애창가요 모음집 송해송이라는 제목으로 연속 음반을 냈다. 오민석 교수의 평전에 따르면 고인은 이 6장의 앨범에 실린 108곡의 취입을 단 이틀만에 끝냈다고 한다. 평소 100여곡의 뽕짝가사를 외울 정도의 비상한 암기력 덕분이다.

 

84세인 2011나팔꽃 인생 60- 송해 빅쇼라는 투어 공연도 벌였다. 2013년까지 햇수로 3년 간 전국 18개 지역에서 총 42회 공연의 거의 전석이 매진됐다. 2015년 초엔 8집 싱글앨범 유랑 청춘을 통해 신곡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해 세종문화회관에서 희극인 첫 공연이라는 이정표를 남기기도 했다. 그의 나이 88세였다. 고인은 북녘에 두고 온 어머니를 평생 그리워했다. 한번은 소식을 물을 기회도 있었다. 남북관계 해빙기였던 2003811일 평양 모란봉 공원 야외무대 전국노래자랑이 열렸을 때다. 생이별한 모친과 누이가 살아 있다면 승용차로 30분 거리에 있을 터였다. 주변에서 연락해보라는 권고도 했지만 그는 질끈 눈을 감았다.

 

행여나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고 그의 평전을 쓴 오민석 시인문학평론가는 전했다. 고인은 평생 '딴따라'를 자처했고 대중문화예술인이란 데 자부심을 가졌다. 2003년 김대중 정부로부터 보관문화훈장 받았을 때 수상소감이 나는 딴따라다. 영원히 딴따라의 길을 가겠다였다. 2015년 은관문화훈장 수상 땐 대한민국 대중문화 만세!”라고 큰 소리로 외치기도 했다. 생전 그의 삶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송해 1927’(감독 윤재호)2020년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선보였다. 60여년을 해로한 부인 석옥이 여사를 20181월 지병으로 먼저 보냈다. 유족으로 두 딸과 손주들이 있다.

 

 

 

 

 

 

 

 

 

 

 

 

 

각별했던 사진 사랑카메라 렌즈로 세상 바라본 조양호

 

"많은 사람들이 행운을 쫓다가 정작 주변에 있는 행복을 잊고 삽니다. 가족, 친구, 그리고 여행이 제 행복의 원천임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깁니다." 지난 20194월 세상과 안타까운 이별을 하고 평생 동경하며 사랑했던 하늘로의 영원한 비행을 떠난 고()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생전 사진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 한진그룹은 67일부터 627일까지 3주간 서울 서소문 소재 대한항공 빌딩 1층에 위치한 일우스페이스 1, 2관에서 '하늘에서 길을 걷다하늘, 나의 길'이라는 주제로 조 선대회장이 생전에 촬영한 사진 총 45점을 비롯해 유류품 등을 전시하는 '고 일우(一宇) 조양호 회장 추모 사진전'을 개최한다.

 

생전 조양호 선대회장의 사진 사랑은 각별했다. 일을 하면서도 언제나 한 손에 들려 있었던 사진기는 조 선대회장이 사진을 하나의 취미활동이자 일로 바라보고 언제나 함께 했다는 것을 방증한다. 특히 조양호 선대회장은 카메라 앵글을 바꾸면 똑같은 사물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다고 믿었다. 관점을 변화로 기업의 혁신을 추구하는 '앵글경영론'이 그의 대표적 경영철학으로 자리잡은 이유다. 그가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때 부친인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로부터 카메라를 선물로 받은 것이 계기다. 부친과 여행을 자주 다녔는데, 부친이 항상 카메라를 갖고 다니며 사진 촬영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진 촬영에 대한 꿈을 키웠다.

 

조양호 선대회장은 "부친이 선물해주신 카메라를 메고 세계를 여행하며 렌즈 속에 담아왔던 추억들이 아직도 가슴속에 선연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바쁜 업무 속에서도 틈틈이 사진에 대한 안목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국내외 사진 전문 잡지를 보면서 마음에 드는 것은 스크랩해 두었다가 작품 활동에 참고하기도 했다. 사진 전문가와 만날 기회가 있으면 서로 의논을 하며 미진한 부분을 고쳐나가는 노력을 기울였다. 국내·외 출장을 떠나는 조양호 선대회장의 손에는 반드시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어떤 목적의 여행이든 길을 나설 때면 항상 카메라를 챙겼다. 바쁜 해외 출장 중에도 차장 밖의 멋진 풍광이 눈에 들어오면 지나치지 않고 차를 세워 촬영을 하는 열정도 보였다.

 

그의 각별했던 사진 사랑과 관련한 흥미로운 에피소드도 있다. 200910월 당시 세르비아 우리나라의 평창은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유럽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 2018년 동계올림픽 유치를 놓고 독일의 뮌헨, 프랑스의 안시가 치열하게 3자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결전의 프리젠테이션 전날 당시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원장었던 조 선대회장이 평소대로 주변의 풍광을 담기 위해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외출을 했다. 이 모습을 목격한 경쟁국 유치 위원들은 저마다 "평창 유치단은 이번 경쟁에서 여유가 있나 보다"며 웅성거렸다. 프리젠테이션을 목전에 두고 머리를 맞대며 고심하던 경쟁국 위원들에게 조 선대회장의 여유로움은 부러움을 자아냈다는 후문이다.

 

카메라와 함께 하는 조양호 선대회장의 여행은 업무의 연장선이기도 했다. 특히 그는 신규 시장 개척을 위해 미 취항지를 중심으로 해외의 많은 곳을 찾아 여행에 적합한 곳인지, 또 새로운 노선을 개설할만한 곳인지를 직접 확인했다. 조양호 선대회장은 200210월 중국 양쯔강을 탐험하면서 쌴샤댐과 거대한 양쯔강 물줄기, 주변의 도시들을 보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소회했다. 2002년 당시는 대한항공이 지난, 옌타이, 샤먼 등 중국 대륙에 공격적인 진출이 이뤄지는 시기였다. 그는 당시 양쯔강에서 중국의 잠재력을 보았고, 어떤 방법으로 중국에 접근해야 할지도 깨달았다. 그는 새로운 여행지를 좋아했다. 마음에 든다고 해서 한 곳을 여러 번 방문하기보다는 안 가본 곳, 사람들이 잘 안 가는 곳, 그래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여행지를 선호했다. 베트남의 하롱베이나 터키의 이스탄불, 중국의 황산 등은 여행을 통해 그 시장 잠재력을 간파하고 항공노선으로 개발해 성공한 대표적 사례다.

 

조양호 선대회장은 자신의 사진이 자신만의 것으로 남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2002년부터 자신의 사진으로 달력을 만들어 외국 기업 CEO, 주한외교 사절 등 국내외 지인들에게 선물해왔다. 그가 캘린더를 선물한 것은 평범한 눈으로 바라본 풍경 사진 한 장이 서로 공감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2011년 달력 첫 장에 "요즘 손자들을 보며 세상 사는 법을 다시 배우고 있습니다. 나의 선친이 내 아들과 그랬듯이 나도 손자들과 함께 세상 구경 나설 날이 기다려집니다. 그때 카메라를 통해 보는 세상이 다양한 의미로 다가온다는 것을 진정 알게 되겠지요"라고 적었다. 사진에 담긴 조 선대회장의 진심이 잘 담겨 있는 문구라는 평가다.

 

조양호 선대회장은 2009년 국내 및 해외 각지를 다니면서 틈틈이 촬영한 사진 중 대표작 124점과 이에 대한 해설을 260여 페이지에 담아낸 사진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이 사진집에는 하늘에서 지상의 풍경을 담아낸 다양한 사진을 비롯해 아름다운 하늘의 모습, 창공을 날아가는 새, 광활한 대지에 뻗은 길 등 글로벌 종합 물류 기업의 최고경영자로서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사진이 빼곡히 수록돼 있다. 특히 스위스 출장 중 알프스의 이국적인 겨울 풍경을 담아낸 '제네바에서 체르마트를 가는 길'을 비롯해 이집트 지혜와 미의 여신인 이니스를 모시는 아스완 필래(Philae) 신전 회랑의 모습을 찍은 사진, 중앙아시아 위대한 정복자였던 티무르 왕조의 영묘인 누르 에미르의 모습을 광각렌즈로 담아낸 사진, 세계적인 화가 르누아르가 마지막 생애를 살았던 집 정원의 올리브 나무 숲을 평화로운 모습을 렌즈로 담아낸 작품에서는 사진에 대한 그의 열정과 애착을 느낄 수 있다.

 

조양호 선대회장은 20098월 사진에 대해 뛰어난 재능과 열정을 가진 재목이 국제적 경쟁력을 가진 유망한 사진가들의 든든한 후원을 기반으로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호를 딴 '일우 사진상'을 제정하기도 했으며, 지금까지 꾸준히 이어져오고 있다. 20104월에는 서울 서소문 사옥 1층에 시민들을 위한 문화전시공간인 '일우 스페이스'를 개관했다. 이는 다양한 사진 및 작품들을 전시할 수 있는 서울 도심 속의 문화 공간으로 시민들에게 작은 쉼터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 사진전 첫날 오후 열린 개막행사에는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이명희 정석기업 고문, 조현민 한진 사장 등 유가족과 외부 인사, 한진그룹 전·현직 임원 등이 참석했다. 조양호 선대회장의 흉상 제막 행사도 함께 진행됐다. 조원태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부친의 각별했던 사진 사랑을 회고했다. 조원태 회장은 "아버님과 함께 출장길에 나서던 그 때가 생각이 난다""바쁜 와중에도 카메라를 챙겨 같은 풍경을 각자 다른 앵글로 담아내고, 서로의 사진을 보며 속 깊은 대화를 나눴던 일들 하나하나가 아직도 기억 속에 선연하다"고 말했다.

 

조현민 사장은 가족 추모사를 통해 "일과 가족밖에 몰랐던 아버님이 쉬시기 위해서 어쩌면 이 지구가 너무 작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아버님을 다시 만나면 딸이라 너무 행복했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다고단 하루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고, 너무나 보고 싶다"고 전했다. 외부인사로 추모사를 맡은 유승민 IOC 위원은 "조양호 선대회장께서는 일우라는 당신의 호처럼 큰 집과 같은 분이었다""돌아보면 삶의 중요한 궤적마다 회장님의 도움과 가르침이 있었다"고 말했다. 사진전 기획을 맡은 구본창 교수는 "조양호 선대회장께서 사진으로 남기신 길과 그 시선을 따라가보면 한계없고 자유로운 하늘과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동경과 따뜻한 애착, 그리고 새로운 길에 대한 의지가 감동으로 다가온다"고 이번 전시에 의미를 부여했다.

 

 

 

 

 

 

 

 

 

 

이준석 vs 윤핵관 마찰옥쇄파동 흑역사 끊나

 

국민의힘에 벌써 이준석 대 윤핵관의 집안싸움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6·1지방선거 개표 종료 직후 이준석 대표가 띄운 당 혁신위원회가 갈등의 단초다. 국민의힘 혁신위원으로 내정된 천하람 변호사는 67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선거 직전에 룰(규칙)을 만지면 더 큰 오해를 받기 때문에 총선을 2년 정도 앞둔 지금이 룰을 바꿀 최적의 시기라고 말했다.

 

벌써, 공천인가

당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국회의원 공천권은 여야를 막론하고 당내 갈등의 최대 도화선이다. 국민의힘 중앙당 관계자는 선거 다음날 이 대표가 처음 혁신위를 꺼냈을 때는 다들 더불어민주당보다 우리가 먼저 혁신하는 모습이 필요하다며 수긍하는 분위기였는데, 공천 시스템이 화두가 되면서 분위기가 묘하게 껄끄러워졌다고 전했다. ‘이준석 혁신위당 조직 정비 공천시스템 개선 당원 자질 향상 등 세 축의 개혁 과제를 내세운다. 최재형 혁신위원장이 현재로선 구체적으로 뭘 하겠다는 것을 밝힐 상황은 아니다”(7일 중앙일보 인터뷰)라고 말을 아끼고 있지만, 천 변호사가 이날 공천룰 조기 개정 가능성을 시사한 건 이 대표를 위시한 당내 소장파들의 공천 주도권 선점 신호탄이라는 게 당 안팎의 시각이다.

 

당내 이준석계로 분류되는 김용태 최고위원은 이날 통화에서 이 대표와 공천 개혁에 대해 구체적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다면서도 당원과 지역주민의 의사가 중요한 지방선거는 100% 경선 원칙이 맞고, 총선은 당헌·당규에 정해진 20% 비율 이상으로 전략공천이 되면 문제가 된다고 본다고 말했다. “나머지 지역은 다 경선 중심으로 가야 한다. 결국에는 원칙을 지키는 것이 이기는 길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윤핵관측은 이준석 대표가 갑자기 공천 개혁 얘기를 꺼낸 건 결국 자기 장사를 하려는 의도로 보고 있다.

 

옥새 파동의 악몽

국민의힘은 201620대 총선 때 공천 개혁을 추진하다 갈등으로 몰락을 길을 걸었던 뼈아픈 경험이 있다. 박근혜 정부였던 당시 김무성 새누리당(국민의힘 전신) 대표가 상향식 공천을 외치며 오픈 프라이머리(국민참여경선)와 국민공천제 확립을 추진했지만, 친박 세력과의 갈등으로 이른바 옥새 파동을 겪었다. 당시 김무성 대표는 공천 후보자 추천서에 찍어야 하는 당대표 직인 날인을 거부하고 기자회견 후 돌연 지역구(부산 영도)로 내려가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전직 의원은 친박 세력의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이 박근혜 아바타로 불리며 경선에서 친박계가 유리하도록 개입하면서 자중지란이 벌어졌다그 결과 180석을 얻을 수 있었던 선거에서 122석을 얻는 데 그쳤고, 이 파동이 계기가 돼 결과적으로 박 전 대통령이 탄핵, 구속까지 당한 것이라고 회상했다.

 

윤핵관에 쏠리는 눈

정치 입문 여덟 달 만에 대통령이 된 윤석열 대통령은 전임자들처럼 당내 계파가 두텁지 않다. 캠프 시절부터 윤핵관(윤석열측 핵심 관계자)’으로 자리매김한 권성동 원내대표, 장제원 의원 등이 친윤(親尹) 구심점으로 활동 중이지만 과거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과 비교하면 대통령 직계로 볼 수 있는 의원들은 별로 없다. 집권 초반엔 대통령과 여당이 밀착하지만, 집권 중반기로 접어들면서 양측의 균열이 발생하는 현상이 역대 정권마다 되풀이되곤 했다. 때문에 윤핵관측은 안정적 국정운영을 위해 2년뒤 총선을 통해 친윤계의 확대를 도모할 가능성이 큰 데 그 과정에서 또다시 공천룰 분쟁이 벌어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여권 원로로 꼽히는 전직 중진 의원은 승리로 끝나 뒷말이 없지만, 이번 지방선거 공천에서도 전과자가 다수 포함되는 등 문제가 적지 않았다윤석열 대통령이 공정을 기치로 대통령이 됐는데, 정작 총선 공천이 공정하지 않으면 보수 진영의 세포 조직이 또다시 분열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이준석 대표의 성상납 의혹 징계를 결정할 당 윤리위원회에는 벌써 전운이 짙게 끼어있다. 이 대표 출국 직전부터 당내에서는 윤리위원 중 친윤 성향 위원들이 대표 징계를 강하게 주장한다”(윤리위 관계자)는 말이 돌았다. 키를 쥔 윤핵관들은 일단 공개 움직임을 자제 중이다. 장제원 의원은 지난달 17일 아랍에미리트(UAE)에서 귀국한 뒤 이렇다 할 공개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다. 권성동 원내대표는 이날 원내대책회의 후 기자들에게 당 대표와 원내대표는 항상 당 구성원들로부터 비판받는 자리에 있다. 그런 비판 자체를 권력다툼으로 비하하는 것은 억측이라고 말했다. 전날 기자간담회에서 혁신위 구성이 조금 성급했다고 말한 걸 하루 만에 수습했다.

 

 

 

 

 

 

 

 

 

 

모두가 윤석열의 사람들검찰 출신의 검수완판

 

윤석열 대통령의 검찰 측근들이 국정 요직을 꿰차고 있다. 법무부와 검찰은 물론 고위공직자 인사, 정보, 대통령실 운영 등 국정의 주요 기능을 검찰 출신이 접수하는 모양새다. 헌법의 기본 정신인 견제와 균형 원리가 무너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위원회는 67일 윤석열 정부 첫 금융감독원장으로 이복현 전 서울북부지검 형사2부장검사(50·사법연수원 32)를 임명 제청했다고 밝혔다. 윤석열 대통령이 곧바로 임명해 이 원장은 이날 취임했다. 검찰 출신이 원장에 발탁된 건 1999년 금감원 설립 이래 처음이다.

 

이복현 신임 원장은 대표적인 윤석열 사단인사로 꼽힌다. 평검사 때인 2006년부터 대검 중수부에서 윤 대통령,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 손발을 맞췄다. 2013년에는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수사팀에서 수사팀장이던 윤석열 대통령과 일했다. 이복현 원장은 지난 4월 더불어민주당이 검찰의 수사권을 제한하는 검찰청법 개정 등을 추진하자 현직 검사 중에서는 처음으로 반발성 사표를 던졌다. 이복현 원장 인선은 윤석열 정부의 검수완판’(검사와 수사관의 완전한 판) 인사와 맥을 같이 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금까지 내각의 차관급 이상 임명직 7자리에 검사 출신을 임명했다. 검사·검찰 수사관 출신 인사 6명은 대통령실에서 인사·총무·공직기강·법률 등의 업무를 맡고 있다. 능력이 인선 기준이라는 대통령실의 설명에도 대통령과의 인연친분이 영향을 미친 것 아니냐는 지적이 계속됐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49·27)과 함께 윤석열 사단투톱으로 꼽히는 조상준 전 검사장(52·26)은 국정원 기조실장을 맡았다. 검찰 출신으로 윤석열 대통령의 검찰총장 시절 직무정지 사건의 변호를 맡은 이완규 전 변호사(61·23)는 법제처장에 임명됐다.

 

여기에 이복현 원장 인선까지 발표되자 끼리끼리 인사의 문제점이 한층 심화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견제와 균형으로 권력을 나누기보다는 검찰 출신 인사들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한동훈 장관은 취임 직후 검찰 주요 보직에 윤석열 사단검사를 대거 배치한 터다. ‘대통령-법무부 장관으로 이어지는 검찰 직할 체제가 마련됐다는 말이 나왔다. 경찰을 통할하는 행정안전부 장관은 판사 출신으로 윤석열 대통령의 충암고·서울대 후배인 이상민 변호사(57·18)가 맡았다. ‘경제 검찰로 불리는 공정거래위원장에는 검찰 출신인 강수진 변호사(51·24)가 유력하다. 강수진 변호사는 수원지검 성남지청 근무시절 윤석열 대통령, 이노공 법무부 차관과 카풀 통근을 했다고 한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당초 권력기관을 검찰, 경찰, 금감원 등 여러 곳으로 나눠놓은 것은 헌법의 기본원리인 견제와 균형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며 그런 기관들을 동일한 배경을 가진 인사들이 장악할 경우 권력이 집중되고, 검찰이라는 하나의 시각으로만 국정운영이 이뤄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검찰을 사회의 최고 엘리트 집단으로 보는 윤석열 대통령의 검찰주의가 스스로 인재풀을 좁혔다는 지적도 있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검찰에서 다양한 부서의 고위 공직자들을 수사한 경험이 검사 이외의 인사들은 부패할 수 있다는 결론으로 귀결된 것이 아닌가 싶다면서 국정운영은 폭이 굉장히 넓기 때문에 다양한 경험과 관점이 필요한데 검찰 인사들로만 채워져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기 어려울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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