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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04 새해 첫 로또 1등 ‘19억 6천만원’ 13명… 전국의 명당 판매점은?

담바우1990 2021. 1. 4. 04:36

210104 (월)  새해 첫 로또 1등 ‘19억 6천만원’ 13명… 전국의 명당 판매점은?

 

2021년 새해에 들어 지난 1월 2일 추첨한 제944회 로또 1등 당첨번호는 '2·13·16·19·32·33'으로 결정됐다. 2등 보너스번호는 '42'다. 당첨번호 6개를 모두 맞힌 1등 주인공은 모두 13명으로 당첨금 19억6183만6356원씩 받는다. 당첨번호 5개와 보너스 번호를 맞춘 2등은 79명으로 5380만5639원씩 받는다. 5개 번호를 맞춘 3등 3057명은 139만464원을 각각 받아간다. 당첨번호 4개를 맞힌 4등(고정 당첨금 5만원)은 14만7665명, 당첨번호 3개가 일치한 5등(고정 당첨금 5000원)은 244만455명이다.

 

1등 복권 판매점은 자동 선택 7곳, 수동 선택 6곳으로 나타났다. 자동 선택 1등 판매점은 서교동가판점(서울 마포)·어머화장품(서울 송파)·노다지로또(인천 서구)·더드림(경기 안산)·행운복권방(경기 안성)·대성기획(경기 용인)·서정천하명당(경기 평택) 등이다. 수동 선택 1등 판매점은 용꿈돼지꿈(서울 마포)·로또복권방(부산 해운대구)·오포우림로또(경기 광주)·오이도직판장마트(경기 시흥)·로또마트(경기 평택)·달성로또복권판매소(충남 아산) 등이다. 당첨금 지급기한은 지급개시일부터 1년이다.

 

 

 

 

 

 

신축년 흰 소의 해… '풍요와 부' 흰 소, "만나보 소~"

 

농촌진흥청은 2021년 신축년(辛丑年) ‘흰 소의 해’를 맞아 1월 3일 사육 중인 흰 소를 공개하고 흰 소와 관련된 이야기를 소개했다. 농촌진흥청 국립축산과학원은 경남 함양에 있는 가축유전자원센터에서 흰 소 25마리를 기르며 연구하고 있다. 가축유전자원센터는 2009년 흰 소 3마리를 수집한 이후 생명공학 기술을 통해 복원·증식해 오고 있다.

 

가축유전자원 센터는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흰 소 어미와 송아지가 함께 걷는 모습, 초지에서 풀을 뜯는 모습 등 직접 촬영한 영상과 사진을 공개했다. 이어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했던 흰색 한우인 백우 이야기를 소개했다. 1399년 발간된 조선 시대 수의학서 신편집성마의방우의방(新編集成馬醫方牛醫方)의 기록을 보면 과거 우리나라에는 칡소, 흑우, 백우, 청우, 황우 등 다양한 털색을 가진 한우가 존재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황색 한우를 제외한 백우, 칡소, 흑우, 제주 흑우 등 한우는 잡소로 취급해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됐다. 농촌진흥청 국립축산과학원은 2009년 정읍과 대전에서 백우 암소 2마리와 수소 1마리를 수집했다. 이후 인공수정, 수정란 이식 등 생명공학 기술을 활용해 개체 수를 늘려왔다. 가축유전자원센터는 백우가 황색 한우와 같은 계통이지만 백색증(알비노)으로 털이 흰색이며, 흰색 계통인 외래 품종 샤롤레와는 전혀 다른 우리 고유 한우의 특징을 가진 것을 밝혀냈다.

 

백우는 멸종위기 단계로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 가축다양성정보시스템(DAD-IS)에 우리나라 품종으로 등록돼 있다. 국립축산과학원은 2020년부터 백우, 칡소, 흑우 등 희소 한우의 유전 특성을 분석하고 과배란 처리(암소가 다수의 난자를 배란하게 하는 것), 성판별 등 생명공학기술을 개발해 가축 무리 조성 연구를 추진하고 있다. 백우의 가축 무리가 조성되면 분자 유전학적, 영양 생리적 특성을 밝히고 번식·개량 및 사양관리 연구도 추진할 계획이다. 이성수 가축유전자원센터장은 "흰 소의 해를 맞아 백우 등 다양한 희소 한우 유전자원을 확보하고 차별적 특성을 밝혀 가축 유전자원의 가치를 확보하는 데 더욱 힘쓰겠다"고 말했다.

 

 

 

 

 

 

이재명, 새해 대선후보… 각종 여론조사 선두

 

차기 대권 후보인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새해 들어 발표된 각종 대선후보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월 2일 최근 발표된 여론조사 10곳 중 8곳에서 1위를 차지하며 연초부터 대선판을 흔들고 있다. KBS가 여론조사기관인 (주)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지난달 12월 27일 ~ 12월 29일까지 전국 1000명을 대상으로(95% 신뢰수준에 ±3.1%p) 차기 대선후보 적합도를 조사한 결과 이재명 경기지사가 21.7%로 가장 높은 지지를 얻었다. 이어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 16.9%, 윤석열 검찰총장이 13.8%로 뒤를 이었다.

 

SBS가 여론조사기관 입소스에 의뢰해 지난달 12월 28일 ~12월 30일까지 전국 만 18세 이상 1001명을 대상으로(95% 신뢰수준에 ±3.1%p) '내년 대선 출마가 거론되는 인물들 가운데 누구를 지지하는지' 물은 조사에서 이재명 경기지사가 23.6% 지지율로 가장 앞선 것으로 조사됐다. 이어 윤석열 검찰총장 18.5%, 이낙연 민주당 대표 16.7%를 기록했다.

 

MBC가 여론조사업체인 코리아리서치인터내셔널에 의뢰해 지난달 12월 29일 ~12월 30일 전국 성인 1007명을 대상으로(95% 신뢰수준에 ±3.1%p) 차기 대선후보 지지도를 조사한 결과 이재명 지사 20.8%, 윤석열 검찰총장 18.2%, 이낙연 대표 17.5%로 나타났다. 한겨레가 여론조사기관 케이스탯리서치에 의뢰해 전국 만 18세 이상 유권자 1000명을 대상으로 지난달 12월 27일 ~ 12월 29일 여론조사(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3.1%p)한 결과 '차기 대통령감으로 누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23.8%가 이재명 경기지사를 꼽았다. 이어 윤석열 검찰총장 17.2%,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 15.4% 순이었다.

 

현대리서치연구소가 서울신문 의뢰로 지난달 12월 28일 ~ 12월 30일 전국 18세 이상 남녀 101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대선후보 여론조사(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3.1%p)에서도 이재명 경기지사는 가장 높은 26.7%의 지지를 받았다. 윤석열 검찰총장 21.5%,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 15.6% 순으로 뒤를 이었다. 조선일보·TV조선이 칸타코리아에 의뢰해 지난달 12월 27일 ~ 12월 30일 전국 유권자 101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차기 대선 공동 여론조사(95% 신뢰수준에 ±3.1%p)에서 여야 잠재 대선 후보 12명 중 '누가 다음 대통령이 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은 결과 이재명 경기지사 18.2%, 이낙연 대표 16.2%, 윤 총장 15.1% 순으로 선두 경쟁을 벌였다.

 

동아일보가 리서치앤리서치에 의뢰해 지난달 12월 27일 ∼ 12월 29일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차기 대통령 적합도 여론조사(95% 신뢰수준에 ±3.1%p)에서는 이재명 경기지사가 24.6%의 지지율로 가장 높은 지지를 받았고, 이낙연 대표 19.1%, 윤석열 검찰총장 18.2% 순으로 집계됐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이번 조사결과에 대해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이재명, 이낙연, 윤석열 3강 체제가 뚜렷하게 표출됐다"며 "이재명 지사가 kbs, mbc, sbs 방송3사와 보수(동아.조선), 진보(한겨레), 중도(서울) 조사의뢰기관 모두에서 1위로 조사돼 과거와는 확연히 다른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고 평가했다. 이재명 지사가 각종 여론조사에서 가장 높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코로나19 위기 속에 5인 이상 사적모임 금지 등 선제적인 조치로 강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는데다 기본소득, 지역화폐 등 서민 경제활성화를 위한 차별화된 정책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최근 추미애-윤석열 갈등,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 하락 등 위기를 느낀 여당 지지층이 이재명 지사 쪽으로 쏠리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재명 지사는 2021년 신년사를 통해 "'경제적 기본권' 확대로 미래를 대비하겠다"고 밝히며 사실상 내년에 치러질 대선의 핵심 화두를 던졌다. 이재명 지사는 "공동체 전체가 함께 일군 사회적인 부를 나누어 누구나 인간다운 최소한의 삶을 누릴 수 있도록 '경제적 기본권'을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는 2022년 3월 실시되는 대통령선거 출마와 관련해 이재명 지사는 "국민이 정하는대로 그 길을 가겠다"고 밝혔다.

 

이재명 지사는 뉴시스와의 신년 인터뷰에서 "(대선출마 일정은) 미정이다. 5200만을 상대로 하는 일이고 그게 억지로 한다고 되겠나. 머슴, 일꾼이 어떤 역할을 하는 게 가장 바람직한지는 고용하는 주인인 국민이 정하는 것"이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어 "지금 스마트폰으로 무장한 5200만 국민들이 얼마나 위대한 집단지성체인가. 행동하는 집단지성체가 됐기 때문에 그걸 믿어야 되고, 또 거기에 순응해야 된다"며 "도정을 잘해서 더 큰 성과를 만들어내는 게 해야 될 일이고.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아흔살, 저는 오늘도 문재인 대통령께 편지를 씁니다

 

21년 수형 장기수 오기태의 망향곡 "죽기 전 가족이 있는 북에 가고 싶습니다"… 오기태는 잠을 설치다가 몸을 일으켰다. 새벽 2시, 사방이 깜깜하다. 동생 조상이는 어제 일이 고되었는지 이불을 저만치 밀어내고 곤하게 잔다. 오기태는 이불을 덮어주고 그의 손을 잡아보았다. 거칠고 팍팍하다. 오기태가 1930년생이고 조상이가 50년생이니 올해 90세와 70세, 두 사람은 북에서 남파되었다가 전주교도소에서 처음 만났다. 1989년 12월 24일 같이 출소했고 2000년부터는 전주 평화동 주공아파트에서 20년을 함께 살고 있으니 특별한 인연이다.

 

오기태는 오른쪽으로 굽은 허리를 일으켜 책상에 앉았다. 대통령에게 청원서를 쓰겠다고 마음 먹은 지 벌써 한 달. 눈은 컴컴하고 손마디는 힘이 없어 글씨는 엉망이었다. 컴퓨터를 들여 자판 연습을 해보다가 하루 만에 포기했다. 그리고 다시 볼펜을 잡고 여러 날 동안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오늘은 어떻게든 마무리 지을 참이다. 갑자기 새된 기침이 나온다. 그는 조상이의 잠을 깨우지 않으려고 소리를 낮추고 휴지를 입에 갔다 댔다. 그리고 첫 줄을 적었다. “대통령님께 부탁드립니다. 제 나이 올해 구십입니다. 살날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죽기 전에 북녘땅, 아내와 자식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 1969년 남한에 내려오다
오기태는 노동당 문화부의 소환을 받고 남파되었다. 1969년 7월 황해도 해주에서 달빛을 안고 내려와 전남 장흥의 수문리 해안가에 닿았다. 그날 밤은 야산에서 남해 바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몸을 뉘였다. 다음 날 일찍, 전남대 출신의 조장 이봉로와 함께 기차를 타고 광주로 향했다. 그곳에서 두 달간 노동자와 학생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것이 임무였다. 오기태는 광주 대인동 근처 여인숙에 숙소를 잡고 일당 잡부로 건설 현장에 나갔다. 노동자들과 담배를 나눠 피며 "내 고향은 신안군 임자도요"라고 통성명을 했고 국밥집에서 대포 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일요일에는 이봉로 조장과 전남대 앞 서점에 들러 책도 사고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금세 다가온 9월 하순의 귀환 날, 오기태는 해가 졌을 때 장흥군 월암리 바닷가에서 땅굴을 팠다. 무전기를 켜고 접선을 시도하려는 참에 "동무, 마을에 가서 담배 한갑 싸게 사오겠소"하며 조장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검은 바닷가에는 달빛을 실은 파도가 밀려왔다가 잔 물방울을 뿌려댔다. 사위는 물소리와 간혹 꾸룩대는 기러기 소리뿐이었다. 무전을 쳐야 할 시간이 넘었는데 조장의 발자국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오기태가 마을 쪽 어둠을 근심스레 바라볼 때 정적을 깨는 총성이 한 발, 곧이어 대여섯 발이 '드드드' 울렸다. 비명 소리와 고함 소리가 바닷가 마을을 뒤흔들었다. 오기태는 무전기를 집어 들고 땅굴에서 솟구쳐 나왔다. 지금 가까운 보성역으로 서둘러 가면 경전선 새벽 첫차를 탈 수 있다. 만일에 대비했던 계획이 현실이 될 줄이야...

 

오기태가 가까스로 순천행 기차에 올랐을 때에서야 역전 마당에 호루라기가 울리고 경찰이 경계망을 펼쳤다. 그는 순천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2차 접선지인 부산 형제 바위로 갔다. 여기서도 접선에 실패한 그는 3차 장소인 광주로 되돌아왔다. 예전 여인숙에 행장을 풀었을 때, 그는 월암리 바닷가에서부터 일주일이나 옷을 갈아입지 못해 상거지 꼴이었다. 몇 시간 뒤 나타난 경찰 서너 명이 그를 에워쌌고 그날로 그는 서울 대방동 미군첩보부대로 이송되었다. 총상을 입고 치료받던 이봉로 조장도 거기서 다시 만났다. 그때는 몰랐다. 이 날이 길고 긴 징역생활의 첫째 날이 될 줄은...

 

◆ 2000년 북한에 가지 못했다
오기태는 눈을 비비며 다음 문장을 썼다.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어 1989년 12월 24일 전주교도소에서 출소할 때까지 21년간 옥살이를 했습니다. 일본놈 앞잡이처럼 민족을 팔아먹지 않았습니다. 살인을 한 흉악범도 아닙니다. 나는 분단된 땅이 통일되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내려왔을 뿐입니다. 남쪽에 와서 노동자와 학생들을 만나 조직사업을 했으나 불과 2개월, 그저 이름 석자 주고 받고 친분을 나눈 정도입니다. 과연 20년 넘게 징역을 살아야 할 정도로 큰 잘못을 한 건가요?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충분한 대가를 치르지 않았나요?

 

어렵게 한 자 한 자 써가던 오기태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그는 2005년 급성폐렴에 걸려 중환자실에서 두 달이나 있었다. 가까스로 회복이 되었지만 그 후 목소리는 새되졌고 마른 기침을 달고 살았다. 창문에는 한밤중의 한기가 달라붙어 성에를 수놓았고 그 위로 달빛이 실눈처럼 쌓이고 있었다. 오기태는 기침을 억누르고 다시 펜을 들었다. 2000년 9월 장기수들이 송환될 때, 이 사람은 '전향'을 했다고 제외되었습니다. 정녕 그 실상을 모르는 겁니까? 전주교도소에서 있을 때 간수들은 한 겨울에 열두명을 한 평도 안 되는 방에 몰아넣고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얼음칼이 옆구리를 찌르고 등 뒤로는 무수한 바늘이 파고 드는 듯했습니다. 입이 쩍쩍 벌어지고 우리는 "살려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돌아온 건 비웃음과 찬물세례, 구두발자국이었습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내 허벅지에 전선줄이 감겼고 땅바닥에 내평개쳐진 물고기 마냥 살점이 퍼덕거렸습니다. 전주교도소의 전향은 이런 고문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미 수없이 증언한 이야기들이고 나는 2001년 내 양심에 따라 '강제전향무효' 선언을 한 바 있습니다. 힘겹게 써내려가던 오기태는 다시 옆구리를 쥐었다. 급성 폐렴으로 사경을 헤맨 지 얼마 안되어 2008년 대장암이 발견되었다. 나이 팔순이 가까워 얻은 큰 병이었다. 가까스로 치료는 되었지만 그 후로 설사와 변비가 되풀이되었다. 지난 해까지만 해도 동네 학산을 오르내렸건만, 올해는 설사기가 심해져 이마저 그만두었다. 오기태는 배를 어루만지며 잠시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창가에는 여전히 어둠이 웅크리고 새벽 햇살을 가로막았다.

 

오기태는 1989년 출소 후 신원보증을 서줬던 전주 남문화방 사장 밑에서 먹고자며 일을 했다. 교도소 목공반에 있었던 그는 표구와 액자 일을 잘했다. 주변에서 "어떻게 저런 사람이 들어왔냐"할 정도로 성실하게 일을 했고 상점과 창고 등 열쇠 다섯 개를 도맡아서 관리했다. 하지만 IMF로 남문화방은 문을 닫았고 오기태는 성공회에서 운영하는 쉼터 '나눔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여기서 살면서 그는 영세민들과 노숙자를 위해서 밥 짓는 일을 하고 상담 일을 맡았다. 그 무렵 다행히 임대아파트가 배정되었고 쉼터를 나와 평화동으로 오게 되었다. 출소 후 두 번이나 결혼사기를 당했던 조상이도 오기태의 임대아파트로 들어왔고 그때부터 두 장기수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오기태는 책상에 묻었던 얼굴을 들고 다시 볼펜을 잡았다. 저는 1989년 12월 24일 출소해서 제일 먼저 고향 임자도엘 갔습니다. 아버지는 총살당하고 형님은 조계산 어느 골짜기에선가 숨졌다고 누이 동생이 일러주더군요. 고맙게도 임자도 초등학교 동창들이 아버지 장례를 치러주었습니다. 저는 선산에 가서 아버님께 술잔을 올리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자식들 때문에 총 맞아 돌아가신 그 한이 눈을 감으시고서라도 풀렸을까요? 아버님 눈에 임자도 푸른 물이 핏빛으로 일렁거렸을 것이고 바다 갈매기는 시체 위를 떠도는 독수리 떼처럼 보였을 겁니다. 분단은 우리 가족에게 큰 한과 아픔을 주었습니다. 상처를 삭히기 쉽지 않았습니다.

 

1950년 전쟁이 일어나자 오기태는 빨치산이었던 형의 권유로 인민군에 입대했다. 목포에서 남해여단에 편입되어 낙동간 전선으로 가려던 차에 맥아더가 인천에 상륙했다. 그는 여단을 따라 목포, 장흥, 지리산, 오대산을 거쳐 강원도 양양으로 후퇴했다. 여기서 인민군 2군단 9사단 32연대로 소속이 바뀌었다. 32연대의 주요임무는 금강산 일대에서 미군의 남쪽 퇴로를 막는 것이었다. 오기태는 참전 후 바로 이곳에서 처음으로 전투를 치렀다. 51년 여름에는 장티푸스에 걸려 큰 고생을 했다.

 

어렵게 회복한 그는 전방에 있을 때 노동당에 화선입당을 했다. 1953년 7월 27일 그는 강원도 철원군 오성산에서 정전협정을 맞았다. 이후 4년간 복무를 더하고 1957년 중사로 제대해 함경북도 온성에 있는 탄광으로 가게 되었다. 그는 온성 탄광에서 탄광지도원으로 승진했고 군인민위원회 상업 검열국을 거쳐 국토청의 온성군 토지관리지도위원이 되었다. 그리고 오기태는 1959년 군수방직공장에 다니던 김외식을 만나 혼례를 치렀다. 3남매를 낳고 막내가 아내 뱃속에 있을 때 소환을 받았다. 그 후 6개월간 야간행군, 태권도, 무전기 사용법을 훈련받고 이봉로 조장과 함께 내려 왔다가 귀환 길에 체포된 것이다.

 

◆ 죽기 전 대통령에게
새벽 4시로 예약 취사를 한 전기밥솥에서 쉬쉬 김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새벽일 나가는 조상이의 아침상을 차려줘야 한다. 오기태는 잠시 글쓰기를 멈추고 일어났다. 청국장을 끓이고 겨울 시금치를 무쳤다. 프라이팬을 달궈 꽁치도 올렸다. 맛나게 먹이고 싶은데 나이가 들어선가 간을 맞추는 게 힘들어져 속 상할 때가 많다.요즘 조상이를 보면 안쓰럽다. 칠십이 넘은 나인데 전주에서 대전 유성까지 그 먼 길을 다니며 공사장 일을 나가니... 오기태는 그를 깨우려다 조금 더 자게 놔뒀다. 밥상 준비를 얼추 마친 그는 책상에 앉아 다시 펜을 잡았다.

 

대통령님, 2018년 평양 능라동 경기장에서 하셨던 감동적인 연설을 기억합니다. 온 겨레가 가슴 벅차게 들었습니다. 저는 누구보다 더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특히 "우리는 5000년을 함께 살고 70년을 헤어져 살았습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지난 70년 적대를 완전히 청산하고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한 평화의 큰 걸음을 내딛자고 제안합니다."라는 구절이 가슴에 사무치게 와 닿았습니다.

 

오기태는 '닿았습니다'에 구두점을 찍고 다시 쿨럭쿨럭 기침을 했다. 사실 오기태는 1차 송환이 좌절되자 혼자 온성으로 넘어갈 수 있는 길을 찾아 나섰다. 2004년부터 여러 번 연변 조선족 자치구로 넘어가서 온성군이 마주 보이는 도문(圖們)시 쪽으로 이동했다. 어찌어찌 중국 공안과도 선을 연결해 가족들의 생사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신통한 결과가 없자 그는 두만강을 그냥 건너가려 했다. 강만 건너면 온성이고 그는 10여 년 이상 그곳에 근무했기에 배를 타지 않고도 건너갈 수 있는 길목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기태는 발걸음을 거두었다. 그는 판문점을 통해서 동료 장기수들과 함께 당당히 돌아가고 싶었다. 그게 올바른 길이고 다른 장기수들에 대한 도리라고 여겨졌다. 포기하고 연변에서 전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눈물이 안개비처럼 고이고 가슴에는 검은 비가 흘렀다. 그러면서 늙은 몸은 오른쪽으로 구부러지기 시작했다. 오기태의 기침이 더욱 심해지더니 오장육부를 게워낼 듯 소리마저 커졌다. 휴지를 급히 뜯어 입을 막았는데도 피가 한 움큼 쏟아진다. 기침을 할 때마다 오줌이 조금씩 새어 나와 속옷마저 축축하다. 오기태는 옷을 갈아입고 다시 책상에 앉았다. 이제 몇 줄만 더 쓰면 된다. 얼른 마무리하고 새벽밥 먹여서 조상이를 출근시켜야 한다. 쿡쿡 찌르는 배를 움켜잡고 기침을 억누르며 다시 볼펜을 꽉 쥐었다.

 

저는 부탁드립니다. 적대를 청산하는 큰 뜻은 작은 일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요? 2차 송환을 간절히 바라는 어느덧 구순을 넘나드는 노인들이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둘 죽어가고 있습니다. 지난 7월에도 강담 선생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두화 선생을 비롯 여러 동지들이 요양원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올해 구십 살인 나도 오늘, 내일을 알 수 없습니다. 2차 송환을 바라는 우리들을 보내주는 일은 평화를 위한 중요한 걸음입니다. 6.15선언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미국 눈치 볼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대통령님이 결심하면 할 수 있는 일조차 늦추면 안 됩니다. 우리들에게는 더 이상 시간이 없습니다.

 

창문으로 어둠을 뚫고 슬그머니 달빛이 들어왔다. 한뼘 조각같은 그 빛은 오기태가 벽에 붙여놓은 두 장의 사진을 비췄다. 한 장은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평양순안공항에서 악수하는 장면이고 나머지 한 장은 2018년 백두산 천지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두 손을 잡고 하늘로 치켜올린 장면이다. 오기태는 두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침이 계속되었다. 고개가 자꾸 떨궈지고 눈마저 감긴다. 일어나 세수를 하고 나니 몸이 바르르 떨렸다. 그는 쓰러질 듯 다시 책상에 앉았다. 감기는 눈을 치뜨고 떨궈지는 고개를 가누며 마지막 줄을 적었다. 죽기 전에 아내 김외숙과 춘자, 정자, ))성일 그리고 이름조차 모르는 막내를 죽기 전에. 죽기 전에… 마지막 구절을 남겨두고 그의 손에서 볼펜이 툭 떨어졌다. 동시에 고개가 푹 책상으로 떨궈졌다. 기침과 숨이 가느다랗게 몇 번 이어지더니 이내 잦아들었다. 오기태의 눈은 어느새 감겨버렸다. 시계는 3시 56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 못다 한 이야기… 민병래(작가)
* 오기태 선생은 2020년 12월 4일 필자에게 생애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날 힘주어 문 대통령에게 청원서를 올릴 것이고 그 요지를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청원서를 올렸는데도 2021년까지 송환이 안 되면 연변을 통해 온성으로 가서, 죽기 전에 가족을 만나겠다고 의지를 밝혔습니다. 그는 생애 구술 삼 일 후인 12월 7일 새벽에 숨졌습니다. 이 글은 그가 채 완성하지 못한 청원서, 새벽에 숨진 상황 등을 담아 그의 삶을 소설 형식으로 구성하면서 썼습니다.
* 오기태에 관한 판결문을 구할 수 없어 조선일보 1969.10.5.일 자 기사 등을 참조했는데 체포 경위 같은 부분에서 오기태의 구술과 상이점이 있으나, 오기태의 구술을 중심에 놓고 서술했습니다. 지면 관계상 전문을 다 수록하지는 못했습니다.
* 이 글의 전문은 1월 11일 이후 민플러스(http://www.minplusnews.com)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전북지역 마지막 비전향장기수 오기태 선생이 지난해 12월 7일 새벽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자택에서 노환으로 숨졌다. 향년 90. 2000년 1차 송환 명단(63명)에 포함되지 못해 2차 송환을 바랐던 고인은 끝내 북에 두고 온 가족을 못 본 채 생을 마쳤다. 그가 숨짐으로써 전국에는 12명의 비전향장기수가 남았다. 1930년 전남 신안군에서 3남2녀 중 둘째로 출생한 고인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에 빨치산 활동을 하던 형의 권유로 의용군에 입대했다. 1957년 중사로 군을 제대한 고인은 함경북도 온성군 탄광에서 일하며 결혼도 해 4남매를 뒀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1969년에 인민위원회 활동을 하던 중 대남공작원으로 남파돼 남쪽 노동자 동향을 파악하다 그해 체포됐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1년간 복역한 그는 1989년 12월 성탄절 특사로 가석방됐다. 그는 전주 ‘일꾼 쉼터’에서 생활하며 1차 송환 명단에 포함되기를 고대했으나 좌절됐다. 교도소에서 전향서에 도장을 찍었다는 게 이유였다. 이후 그는 “강압에 의한 전향은 무효”라며 전향 철회를 선언했다. 북에 두고 온 아내와 자식을 그리워하며 2차 송환을 기다리던 중 2005년에 급성폐렴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섰고, 2008년에는 대장암 수술까지 받았다. 그는 모진 세월을 살아내면서 북의 가족과 함께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고 한다. 전북지역 시민사회단체는 전북에 연고가 없는 고인을 위해 장례위원회를 꾸렸다.

 

방용승 장례위원회 집행위원장은 “올 하반기부터 부쩍 수척해진 오기태 선생은 가족을 생각하면서 잠들 듯이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다. 장례위원회는 “우리는 당신의 삶 앞에서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고 몸을 일으켜 세운다. 당신이 기다려온 그 날을 향해 더 굳건히 나아가려 한다. 님이여, 바람처럼 자유롭게 훨훨 날아가소서. 이승에서의 고통과 모진 세월을 다 잊으시고 편히 쉬소서. 조국이 통일되는 그날에 춤추고 노래하며 이땅에 다시 오소서”라고 추도했다.

 

 

 

 

 

 

 

文대통령 지지율 34.1% 역대 최저… 부정평가는 첫 60%대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이 새해 첫 여론조사에서 역대 최저 수준인 34.1%까지 내려갔다는 결과가 나왔다. 해당 조사에서 부정평가는 사상 처음으로 60%를 넘겼다. 리얼미터가 YTN의뢰로 지난 1월 1일 ~ 1월 2일 전국 만18세 이상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표본오차 95% 신뢰 수준에 ±3.1%포인트)를 1월 3일 공표한 결과에 따르면 문재인 대통령 국정수행에 대한 긍정 평가는 전주보다 2.8%포인트 내린 34.1%를 기록했다. 반면 부정 평가는 61.7%에 달해 리얼미터 역대 조사에서 처음으로 60%를 뛰어넘었다.

 

리얼미터 조사에서 문재인 대통령 역대 최저 지지율은 12월 2주차 36.6%였다. 부정 평가는 12월 4주차에 59.7%로 가장 높았다. 긍정 평가와 부정 평가 모두 역대 최저·최고를 기록한 것이다. 12월 1주차부터 4주차까지 문재인 대통령 부정평가는 57.4%→58.2%→57.7%→59.7%로 60%를 밑돌았지만, 신년 첫 조사에서 처음으로 60%를 넘긴 것이다. 긍정과 부정 평가 격차는 27.6%포인트였다. 정당 지지율은 국민의힘이 34.2%, 더불어민주당이 28.7%로 오차범위 안에서 국민의힘이 앞섰다. 국민의당 9.9% 정의당 5.6%, 열린민주당 4.2% 순으로 그 뒤를 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리얼미터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원주 용화산 1월 풍경 속으로.......

 

 

 

 

 

 

 

 

 

 

 

 

 

 

 

 

 

 

 

 

 

 

 

14:50  해발 260m의 용화산 정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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